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 뭔가요?

비오는 흐린 아침

비가 오는 흐린 아침, 일어나자마자 가벼운 산책을 하려고 나섰다. 나뭇잎이 무성한 푸른 계절은 비 오는 날을 즐기기에 참 좋다. 아침인데도 어둑어둑하고, 멀리 보이는 낮은 언덕에는 구름이 걸려있다. 산책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습한 기운을 머금고, 공기 중에 그 향기를 더한다. 

비 냄새는 많은 감정과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. 비슷한 계절에 섬진강 주변을 혼자서 여행하던 기억이 떠올랐다. 어느 날, 먼 타국에서 맞이하던 낯선 비의 풍경도 떠올랐다. 하지만 떠오르는 그 모든 것이 싫지 않았다. 발끝을 간지럽히는 무사토 산책길을 밟으며, 한참을 걸었다. 해가 비치지 않으니, 나무 그늘이 없는 강가를 걷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. 무성한 나뭇잎 사이를 벗어나 강가로 가니, 보슬보슬 비가 오고 있었다. 이 정도의 빗방울은 견딜 만 했다. 비가 와도 춥지 않은 날씨라 더욱 좋았다. 

지난 열흘 간, 몸이 좋지 않아서 산책을 제대로 못했다. 몸이 안 좋을 땐 감정도 민감해진다. 그래서 일까, 이러다가 또 우울한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들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가 느껴졌다.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더 그렇다. 예전엔 감정이 움직이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, 왜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. 하지만 지금은 내 기분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 몸을 움직여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. 그리고 나는 나를 우울한 상태 그대로 방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, 될 수 있으면 밖에 나가서 걷는 등 몸을 움직여 주려고 한다. 

그렇게 내 안의 어두운 감정을 덜어내고, 자연의 신선한 기운을 마음에 채우기 위해 걷고 있는데, 문득, 이런 생각이 들었다. 


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?

내가 아침 일찍 공복 상태에서 근처 산책로를 걸으면서 기분을 관리하는 것은, 처음에는 나 혼자 만을 위한 것이었다. 하지만, 지금은 내 안을 밝고 긍정적인 기분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. 왜냐하면, 내 안이 기쁨으로 채워져야, 그것이 흘러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. 타인의 일이나 감정에 깊이 공감을 하다 보면, 상대방의 슬픔이나 절망이 내 안에 있던 어두운 감정들을 깨우기도 한다. 그럴 땐, 상대의 슬픔에 공감을 하는 것을 넘어, 내 안의 어둠에 침잠하게 된다. 

최근 나는 우연하게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. 그의 감정이 나에게 왜 이렇게 강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. 그의 절망, 슬픔, 외로움, 쓸쓸함이 내 몸이 아플 정도로 느껴졌는데, 그건 아마도, 내가 이미 유사한 감정을 경험한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. 즉, 그 사람의 아픔을 들여다 보면서, 내 안에 있었던 감정의 기억이 깨어난 것이다. 몸이 아플 정도로. 이럴 때는 잘 먹고, 잘 자는 게 정말 중요하다. 그것조차 소홀히 하게 되기 때문인데, 마음이 아플 때에 몸을 잘 돌보아주면 감정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다. 

그의 아픔을 들여다 보면서, '내가 할 수 있는 건 대체 무엇일까?' 를 생각했다.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, 내게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.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졌다.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졌으면 좋겠다. 고통스러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. 힘들고 아픈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 위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. 그리고 그런 공감의 과정을 통해 각자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었으면 좋겠다. 

나의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? '사랑'이라거나, '연애'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인 것 같다. 애초에 '사랑'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인가?


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

인간이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'사랑'이란, 주 양육자로부터 받는 관심일 것이다.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어린 아기는 울음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데, 그럴 때에 적절하게 취해지는 조치로 이 세상이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라는 '사랑'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. 나의 경우에는 그런 경험보다 이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이 많아서, 최초의 '사랑'은 경험하지 못한 셈이다. 

정말 우스운 것은, 최근 거의 30년 만에 만난 아버지라는 사람이, '사랑한다.'라고 말하며, 앞으로는 아버지만 믿으라고 하더니 한 달도 채 안되어, '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다.'라는 말을 나에게 했다. 그가 말하는 '사랑'이란 무엇이었을까?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고, 그가 흡족하게 여길만한 행동을 할 때에만 발생하는 조건적인 감정인가? '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, 너는 내 딸이다.'라며, 자신이 설정한 자신의 캐릭터에 깊게 빠져있던 그는, 입을 닫고 귀를 닫고 '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다.'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, 그것도 문자로 하고 연락을 끊는 사람이었다. 참, 못났다. 

나의 어머니라는 사람도 크게 다를 게 없다. 나는 어머니로부터 수도 없이 많이 '인연'을 끊자는 말을 들었다. 나는 별로 아쉬울 게 없다. 왜냐하면 같이 살아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극심한 우울증을 앓게 된 건, '나'이기 때문이다. 한 두 번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꾸준히 들었는데, 지금 생각하면, 경제적으로 독립할 힘이 없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함으로써 협박을 하고 싶었던 건가 싶다. '너는 내가 이런 식으로 해도 어차피 갈 곳이 없잖아.'라는 생각에 나를 정신적으로 공격하며 자신의 힘을 확인하며 만족하는 것이다. 

어쨌든 나의 아비와 어미라는 사람의 모습이 이렇다 보니, 나는 '사랑'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. 부모, 가족과의 인간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까, 나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마음을 잘 열지 못한다. 친해지긴 하지만, 깊어지지 못한다. 성인이 되어서도,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. 그래서 제대로 오랜 기간 연애를 해 본 경험도 없다. 좀 친해지면, 내 쪽에서 멀어지거나 하는 식으로 관계를 정리했기 때문이다.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었다.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니, 누군가가 관심을 보여도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기 마련이었다. 


내가 바라는 것

그런 내가, 바라는 것이 생겼다. '사랑'이 무엇인지,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'사랑'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,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매일 바라는 것이 있다. 


당신이 매일 아침, 기분 좋게 눈을 뜰 수 있기를.

당신이 고통에만 집중하지 않기를.

당신이 매일의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기를.

당신이 누구와 함께하더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.

당신이 혼자서 길을 가는 중에도 슬며시 미소 지을 수 있기를.

당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히 하기를.

당신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.